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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ㅏㄴㅣ의 남미여행기 (1) – 프롤로그

200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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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콜롬비아, 지구반대편의 나라로
COLOMBIA, al país del otro lado del mundo

… “그건 그렇고, 콜롬비아 진짜 가기로 한 거야? Really?”

전화통화 내용을 대충 들었던 마사끼가 갑자기 심각해졌기 때문에, 일단은 얼버무려야만 했다.
“아마도(Maybe).” …

“다니, 남미에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기뻐. 그런데 콜롬비아에 들릴 계획은 없는 거야?”

2005년 3월, 이집트 카이로의 술탄(sultan)호텔에 머물던 나는 오랜만에 국제전화를 걸었다. 런던에 사는 콜롬비아 친구인 자스민(Yazmin)은 처음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사귄 나의 첫 번째 외국인 친구이다. 글자 그대로, 아주 특별한 친구.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콜롬비아가 많이 위험하다고 주위에서 말리던데…”

포르투갈 세심브라(Sesimbra)라는 작은 해변에서 만난 브라질 사람들의 친절함과 해맑음을 보고 나는 남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세 번째로 떠난 배낭여행의 원래 계획은 3개월 동안 유럽과 아랍국가들을 둘러보는 것이었지만, 일정은 점점 늘어났고 당시 서른 한 살이었던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번 여행에 쏟아 붓기로 결정했다.

이태리 밀라노의 한 서점에서 남미가이드북을 샀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남미행 비행기표를 발권했다. 북유럽을 거쳐 이집트로 오는 3개월 동안 심심할 때마다 읽었던 남미가이드북의 내용은 이미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내가 처음 생각했던 남미여행은 페루로 들어가서 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에서 리오카니발을 보고 아웃하는 아주 일반적인 루트였다. 여정을 미리 그려보며 즐거운 공상에 빠지던 나는 자스민을 떠올리고 콜롬비아를 가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한 통계에서 ‘2002년 일일 평균 살인 77명, 납치율 세계 1위’라는 구절을 보고나니 차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 포르투갈에서 만난 Eder. 브라질 친구들을 만나고 평소 관심있던 남미여행을 결정했다.

“다니, 한 가지만 물어볼게. 남한(South Korea)은 위험하지 않아?”

“어, 별로 위험하지 않은데(Not really).”라고 대답하고 나니 어리둥절했다. 자스민이 나와 알게 된 지도 벌써 햇수로 3년째, 메일도 대화도 적잖게 주고받았는데, 왜 갑자기 한국의 치안에 대해서 묻는 것일까?

“그렇지? 콜롬비아도 똑같아. 보고타에 오면 일상적인 도시생활을 느낄 수 있을꺼야. 날 믿어봐.”

갑자기 자스민과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난 처음으로 사귄 외국친구에게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루브르박물관에 프랑스군이 훔쳐간 직지심경이 보관중이라느니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자스민은 한 토기(土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한국은 훌륭한 문명을 가졌구나. 우리 콜롬비아에서는 스페인침략자들이 오기 전까지 이런 토기를 사용하고 있었어.”

자스민은 매사에 늘 밝고 차분했지만,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생각없이 자랑에 열중하다가 자스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닐까?’ 한국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을 알리고 싶어서였지 남을 불편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자스민 입장에서 한국인이 우월하고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하나.

남미여행하면서 콜롬비아는 안 와보냐는 자스민에 질문에 나는 또 실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위험하다니까 가기가 좀 그래서…” 외국친구가 한국에 놀러오라고 했을 때 이런 대답을 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우문현답, 자스민이 콜롬비아의 실상을 북한하고 매일 전쟁날 것처럼 보도되는 남한에 빗대어 얘기해 준 것을 느끼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개졌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있어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날 믿고 콜롬비아에 꼭 와야 돼. 우리집 아파트 비어있으니까 거기서 그냥 묵고, 내 친구들도 소개시켜 줄 테니까. 콜롬비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해. 와보면 알게 될 꺼고, 콜롬비아에 오면 어디어디를 가야되고…”

이어지는 자스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예스, 예스, 오케이만 연발했다. 아직 콜롬비아에서 아무런 위험 없이 여행할 수 있을꺼란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그래, 자스민을 믿고 무조건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친구에 배려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앞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걸프렌드?”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술탄호텔에서 매일 술파티를 같이 하던 일본친구 마사끼가 ‘다 안다’는 듯 짓궂은 웃음을 날린다. 유럽 아침시간에 맞춰 새벽에 전화하러 나온 나를 동행해 준 것이다.

 – 술탄호텔에서 머물던 나날들. 남미가이드북과 보드카가 보인다.

“아, 걸프렌드는 아니고…”

내가 아니라고 부인을 해도 마사끼는 믿지 않았다. 이 새벽에 나와서 전화할 정도의 정성이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면서… 예전부터 나도 자스민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서울과 런던 사이의 거리는 너무 힘들 것 같은 생각에 그냥 친구, 하며 더 이상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건 그렇고, 콜롬비아 진짜 가기로 한 거야? Really?”

전화통화 내용을 대충 들었던 마사끼가 갑자기 심각해졌기 때문에, 일단은 얼버무려야만 했다.

“아마도(Maybe).”

다음날, 내가 콜롬비아로 가기로 했다는 소식은 술탄호텔 전체에 퍼졌고, 그날부터 주위사람들은 나의 다음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크레이지!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여행중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새로운 여행을 말렸으며, 나 자신도 런던에서 남미행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 ‘정말 콜롬비아에서 무사히 여행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씻을 수 없었다. 그렇게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남미여행을 떠난 것이 2005년 5월.

…. 그리고 2008년 현재. 나는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다.

남미에서 있었던 그 간의 여러 가지 사연들, 미뤄왔던 이야기들을 이제 조심스럽게 소개해보려고 한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레임을 떠올리면서. 다른 배낭여행자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갈구하고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행복과 자아(自我)를 찾아 떠나는 당신의 행운을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