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스티브 잡스 전기의 번역 오류와 관련, 처음으로 문제 제기를 한 이덕하님의 글들을 읽어보았다.
번역오류도 그렇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유명한 번역가들 가운데 문제의 안진환씨는 무려 2007년에만 30권을 번역했고, 공경희씨 같은 경우는 1년에 22권을 번역하면서 대학교 출강까지 나간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번역계의 김성모 화백 수준이 아닌가?
만화처럼 어시스턴트 인력을 대규모로 두고 스토리, 콘티, 데생, 채색, 스크린톤 작업을 분업화해서 작업하는 식이라면 모르겠으나, 1인이 1년 동안 20~30권을 번역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분량이다.
출판계로부터 들은 번역계 정보에 의하면, 보통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데 출판사가 번역자에게 주는 기한은 3개월 이내이며, 직업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1~2개월에 한 권 끝내는 정도의 속도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번역은 매절 개념이니 번역자는 원고를 넘기면서 일시불을 지급받게 되며, 인세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책이 더 팔려도 번역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다. 대체로 한 권을 번역하면 300~400만원 사이의 번역료를 지급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두 달에 한권씩 번역을 하게 되면 웬만한 샐러리맨 수준의 급여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하루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며 사전과 씨름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글쓴이가 아는 정보를 종합해보면, 다작이 가능한 A급 번역가의 경우 한 달에 한 권 번역하는 정도가 한계에 가까우니 1년에 12권 남짓 번역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도 연속적으로 일이 주어진다는 전제하에서. 출판-번역계약 등에 지연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안진환, 공경희씨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번역가이거나, 알려진 것과 달리 혼자서 번역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 여러 명의 번역 서포터를 두고 본인의 이름으로 출판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CAT(Computer-Assisted Translation) 프로그램의 사용여부이다.
최근에는 번역가들이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사전 뒤져가며 번역하지 않는다. 번역작업시에 워드프로세서 + 사전 + 번역 데이터베이스가 합쳐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러한 프로그램을 CAT tool 혹은 TM(Translation Memory)라고 한다.
CAT tool 분야에서 유명한 프로그램으로는 Trados, Wordfast, Star Transit, OmegaT 등이 있으며, 이런 류의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 번역했던 문장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놨다가, 번역작업중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정도 유사한 문장이 있으면 번역자에게 확인을 시켜주기 때문에 번역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다.
그런데 이덕하님의 번역오류 지적글을 보면, 안진환 번역가의 스티브 잡스 전기중 여러군데에 걸쳐서 같은 뜻의 문장을 다르게 번역한 내용이 눈에 띈다. (예: ‘데스크톱’, ‘세상을 바꿔 봅시다’ 등)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번역가에 대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
- 안진환 번역가는 CAT 툴을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일년에 30권 번역이라는 초인적인 속도를 낼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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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환 번역가는 알려진 것처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혼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혹시 여러명의 번역자에게 번역외주를 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가?
판단은 글을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두는게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2번에 의혹의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데, 다작을 하는 번역가 중에서 CAT 툴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같은 뜻의 문장을 매번 다르게 번역했다는 점에서 말이 되지 않으며, 여러명의 번역가가 파트별로 나눠서 작업을 한 후 합쳤다면 CAT 툴의 사용여부에 관계없이 같은 문장이 다르게 번역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CAT 툴을 사용했다면, 번역가마다 자신의 CAT 툴에 축적된 번역 데이터베이스의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불안정하고 많지 않은 수입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번역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만약 공장식 번역재벌(?)과 같은 번역가가 존재한다면, 단 시간에 다작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번역 퀄리티를 높이는데 신경을 쓰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쪼록 이번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소동이 대한민국 출판계에서 번역물의 품질향상에 대해 신경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족.
- 트윗에서 지인과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관련에 대한 이견이 있어, 이덕하님이 지적한 41개의 문장을 다시 한 번 정독해 보았다. “영어원고 최종본과 안진환 번역자가 작업한 원고가 달랐다”는 민음사와 안진환 번역자의 변을 전제에 깔은 상태로, 부분부분 단어 번역이 누락된 내용을 제외하고도 11~12개의 문장 번역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고 느꼈다.
(예: 리사가 어느 정도는 인정 받았다는 내용을 아예 인정받지 못했다고 번역한 점, 문맥상 상사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존 한 명이 불쾌해했다는 점, 데스크톱 컴퓨터와 진짜 책상을 구별하지 못한 점 등등)
사실 나머지 부분들은 번역자의 스타일 차이거나 무시해도 되는 정도라는 느낌도 받기도 했다. 이덕하님은 민음사와 안진환 번역자의 변을 들은 후 새로 쓴 글에서, 이런저런 점을 다 고려하고도 여전히 당신이 지적한 41개의 문장중 9개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 전세계 동시출간인 책인데, 영어원고 최종본과 한국 번역가가 작업한 원고의 내용이 달랐다면 그것 만으로도 리콜감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판은 이미 개정증보판에 해당하는 것이고 한국판은 초판에 해당하는 것이 되므로.
말씀하신 방식은 ‘인세’방식입니다.
‘매절’은 글의 분량에 비례해 받는 방식임요.
매절을 뜻하고 쓴 내용인데 혼동의 소지가 조금 있었군요. 책이 더 팔려도 번역가에게 인세가 지급되는 개념이 아니므로 매절이 맞습니다. 다만, 초판 부수의 양과 책 가격에 따라 번역물 매절의 가격이 정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
매절은 글의 분량으로 번역료가 책정되는 방식입니다. 보통 분량을 재는데는 원고지 매수를 사용하며, 원고지 매수에 번역단가를 곱해번역료가 책정되지요. 이 경우, 번역료는 단 1회만 지급되며, 아무리 많이 팔려도 더 주는 일은 없습니다. 책의 가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인세는 본문에 나온 말씀하신 대로 책의 판매량과 가격, 인세율이라는 변수에 비례해 책정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는 많이 팔리면 그만큼 많이 줍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혼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은 수정해두었습니다. (: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출판 번역가들은 거의 CAT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술 번역에서는 보편화되어 있지만, 출판 번역은 대개 종이책이나 종이 문서를 보고 번역하는 데다가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고가의 CAT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말씀에 동의하기가 조금 어렵군요. 혹시 CAT툴 한 번 사용해보셨는지요?
CAT툴은 번역보조 도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치하는 문장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fuzzy match로 한 번 번역했던 문장과 비슷한 구조의 문장이 나와도 보여주기 때문에,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했던 문장을 참고하여 번역스타일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번역속도도 당연히 빨라지거니와, 구글번역 등 기계번역 결과물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웬만한 초벌번역이 필요없을 정도더군요.
Trados 같은 제품은 백만원 가량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OmegaT 같은 프로그램은 무료입니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저도 번역을 취미로 하는 레벨입니다만 OmegaT 사용자입니다)
잡코리아 같은 곳에서 웬만한 번역회사에서 프리랜서 모집하는 내용을 참고하면, CAT툴 쓸 줄 모르면 아예 이력서 받지 않는 곳도 많습니다.
물론 번역원본을 종이책으로 받는다면 다시 타이핑을 쳐야하니 좀 애매하겠습니다만, 최근 번역계에서 CAT툴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보는게 제 견해입니다.
번역업계 경력이 오래된 분들이 구식방법을 고수해서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번역생산성을 높이는데 인문번역이던 기술번역이던 CAT툴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도 상당수의 출판사들이 원본을 종이책으로 넘겨줍니다. 때문에 CAT의 활용이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것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원문까지 일일이 다 타이핑 쳐야 되니까요.
그리고 출판 번역의 경우, 기술 번역 문서에 비해 번역물의 볼륨도 훨씬 크고, 다루는 내용도 매우 다양하지요.
아직까지 현장에서는 예전방식 그대로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씀이군요.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스캔받고 OCR 처리하고 스펠체크 기능까지 이용한다면 영문인식률이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저라면 주먹구구식으로 종이책 보면서 번역하느니 이렇게 입력해놓고 CAT으로 작업하겠습니다만.
그리고 기술번역 문서의 볼륨이 일반출판물에 비해 훨씬 큽니다. 사진으로 도배한 포토샵 서적류 말고, 프로그래밍 서적이라던지 천페이지 넘어가는 종류도 허다하죠.
이번 잡스 전기의 경우도 사실은 준 기술번역에 가깝다고 봐야할 겁니다. 번역자가 IT 용어를 몰라서 만들어낸 오역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네, 출판업계는 폐쇄적인 면이 있지요. 타 분야에 대해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늦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역자를 모집하는 일도 드뭅니다. 잡코리아 같은 데서 일반 단행본 번역자 모집하는 글 보신 적 있나요?^^ 물론 문제라면 문제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저는 출판 번역가 중에 CAT 쓰는 사람 한 명도 못봤습니다. 따라서 현실을 잘 모르시고 CAT 관련 의혹을 제기하신 것은 초점이 다소 어긋났다고 봅니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써 놓으셔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보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린 겁니다.
말씀하신 CAT 툴, 번역가들은 대개 싫어하는 물건입니다.
일관적 번역과 번역 속도에 도움을 준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레벨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번역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서포트 기능은 필요없어지고, 오히려 클라이언트측의 ‘단가 후려치기’에만 사용됩니다.
취미로 번역을 하신다니 잘 아시겠지만, 같은 말이라도 우리말로 옮길 때에 뜻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그런 것들까지 전부 ‘같은 것’으로 뭉뚱그려서 ‘이건 일로 안침’이라는 결과를 내버립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일은 다 해놓고도 그만큼 단가가 빠져버리는거죠.
아무리 머신이 서포트 해준다 해도 번역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솔직히 일부 매뉴얼은 나오는 말이 뻔해서 툴로 돌리는게 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돌리면 결국 번역기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초벌번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상한 번역 에이전시를 가장한 학원에서 사람들 속이려고 만든 이상한 말이니, 사용하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반 단행본 번역은 거의 대부분 출판사가 던져준 종이책을 일일이 보면서 번역합니다.
파일로 받는 경우는 드물구요, 파일로 받아도 번역 전문 프로그램으로 번역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못봤습니다.
번역 실력과는 별 상관없이 인맥으로 돌아가는 업계인지라 그냥 막장이에요.
악덕 번역회사에 지원했다가 푼돈만 받고 고생하다 번역회사 대표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는 경우도 허다하구요.
유명 프리랜서 번역가도 인맥 경쟁에서 밀리면 하루 아침에 밥줄 끊어지는 게 이 바닥이죠.
레퍼러가 잡혀서 와보니 블로그 도구를 바꾸셨군요. 다만
>데스크톱 컴퓨터와 진짜 책상을 구별하지 못한 점
이 부분을 보면 여러 명이 작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학원 시절 책번역을 나눠서 한적이 있는데 C언어 책입니다. C언어의 #include를 모르기 때문에 영문과 애들은 대부분 ‘포함을 포함한다’로 변역해 두었더군요. 다만 데스크탑과 책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면 번역에 문제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