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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슬럼가를 체험하고 싶은 당신이라면

200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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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5불당”이라는 여행동호회에 올렸던 글입니다. 한 여행자가 중남미에서 슬럼가에서 무료숙식 제공받으며 다녔다고 주장하고, 다른 여행자들에게 슬럼가 등 위험지역을 체험해보라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기에 반박차 썼던 글인데, 남미여행 하기 전에 한번쯤 읽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 블로그에도 소개합니다.

다른 분들도 아래 공지로 올라온 “여행중 신변안전”에 관한 글과 바로 밑의 글의 미묘한 부조화를 느끼셨는지요? 위험한 곳일수록 더욱 더 구경해봐야 한다, 일부러 위조지폐도 바꿔봐라 등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내용이 정보나 여행자 수칙처럼 포장되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 배낭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안전에 대해 깊게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부족한 글이라도 적어보려고 합니다. 특히 위험한 지역인 중남미 위주로, 밑에 올라온 글을 반박 설명하겠습니다.



1. 위험한 곳이라면 당연히 구경해봐야 한다? 슬럼가도 버스 타고 지나가면 안전하다?

밑에 H님이 쓰신 글을 보면 위험지구일수록 꼭 들러봐야 하며, 슬럼가 같은 곳도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안전하다며 다른 여행자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슬럼가를 지나가는 버스에 탑승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슬럼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남미에서는 현지 버스에서 강도가 그냥 일상생활입니다. 태양여관 스탭인 마이콜의 경우 지금까지 버스(콜렉티보) 안에서 핸드폰만 5번을 강도/도난 당했고, 어떤 날은 신발을 벗겨가서 맨발로 집에 간 적도 있습니다.

또 다른 스탭인 안드레아의 경우 오후 4시에 버스 안에 혼자 있었는데 버스 기사 일당이 납치를 시도하여, 엉뚱한 곳으로 루트를 변경했습니다. 안드레아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자 주위사람들이 신호대기중인 버스 유리창을 깨고 구조한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절대로 콜렉티보 안타고 항상 조금 비싸도 트란스밀레니오(보고타의 지하철식 버스)를 탑니다.)

보고타 치안만 이런 수준인 게 아닙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보고타 외의 기타 중남미 도시에 비하면 보고타 치안은 “안전한 편”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태양여관 스탭인 두 사람 다 보고타 외곽의 변두리(슬럼가는 아닙니다) 쪽에 거주하여 이런 일들을 도심가 사람들보다 자주 겪는데, 진짜 슬럼가를 버스 타고 지나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 Cidade de Deus”을 보시면 중간에 주인공이 버스 안에서 강도를 시도하려다가 포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슬럼가에 사는 현지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유혹에서 시험받을까요. 돈이 그리 많지 않은 현지인끼리도 터는데 하물며 카메라, 달러 현찰, 노트북 등을 들고 다니는 외국인을 본다면…



2. 남미의 진짜 슬럼가란 어떤 곳인가?

밑에 H님이 쓰신 옛날 글 중에 카라카스 빈민촌 친구집에서 묵었다는(그렇다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그렇다면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슬럼가란 어떤 곳인지 한 번 이야기해 볼까요?

제가 모로꼬이 해변에서 알게 된 베네수엘라 친구집에 초대받아 카라카스로 갔을 때, 이 친구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카라카스의 여러 곳을 구경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친구가 먼 발치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쪽이 베네수엘라에서 제일 위험한 슬럼가다”라고 하더군요. “보다시피 언덕에 집들이 네다섯개가 다닥다닥 쌓인 형태로 붙어있는데 입구가 대부분 하나다. 저 안에서 여러 다른 가구들이 어떻게들 먹고 사는지 도대체 상상도 할 수 없다”기에 놀랐는데, 이어지는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슬럼가에 다섯 형제가 있으면 다 창녀 아니면 강도가 된다. 여 자 셋에 남자 둘이면 여자 둘은 창녀, 남자 하나는 살인자, 다른 남자는 강도가 되고 남은 여자애 하나만 대학 간다. 남자 셋에 여자 둘이면 여자 둘은 창녀, 남자 하나는 살인자, 다른 남자는 강도가 되고 남은 남자애 하나만 대학 간다. 이모나 삼촌들이 몸 팔고 살인하는 걸 보고 자란 사람들이라 저런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리고 카라카스내 슬럼가에 사는 사람들의 인구수는 총 백만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 참고로 저의 스페인어 회화는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준입니다. 위의 내용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남미사랑 민박의 주인장이신 덩헌님의 경우, 운전 중에 저 슬럼가 구역을 통과하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옆자리에 베네수엘라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문 다 걸어 잠그고, 절대 속도 늦추지 말고, 최단시간에 통과하라!”고 해서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에서 브레이크 한번 안 밟고 지나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시티 오브 갓 영화에도 나오지만, 슬럼가에서 차가 정지하는 경우 바로 총을 들이대고 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빈민촌과 아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볼리비아 라파스 일부지역, 그리고 콜롬비아 보고타 남쪽(Sur) 지역입니다. 한 마디로 남미에 수도없이 널려있는게 슬럼가입니다.

H님은 여행할 때마다 빈민촌 아이들을 방문하고 현지인집에서 투숙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스스로 여러번 밝히시고 있는데… 아마 다음 셋중 하나의 경우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번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1) 슬럼가 현지인집에서 묵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2) 본인은 묵은 곳이 슬럼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반 거주구역이었다.
3) 슬럼가에서 묵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고 아무런 일도 안 당했다면, 기적이 일어났다.

중남미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우범지대와 안전지대의 구별이 아주 모호한 곳입니다. 범죄의 빈도수 차이만 있지 범죄가 일상화 되어 있는 곳입니다. 태어나서 아직 강도를 본 적이 없다고요? 남미에서 밤 12시에 길거리 혼자 걸으면 바로 눈앞에 출현할 겁니다.

“교민” 레벨에서 말하는 것들 여행자들은 대부분 넘겨 들으시는데, “교민”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실제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반대로 경우로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의 외국인 여성친구가 한국에 여행왔는데, 연쇄강간살인범 출몰지역이 싸다고 거기 가서 묵겠다고 합니다. 이 친구는 어차피 한국말도 모르고 외국인이니까 별 위험도 못 느껴서 그쪽에 숙소 정해서 가려고 하는데, 여러분이라면 이 친구에게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은채 그냥 그 우범지대에서 묵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거기 가지 마라, 꼭 간다면 밤 늦게 절대 걸어다니지 마라, 호신용품을 준비해라 등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지요)

물론, 도난이나 강도에 대한 걱정으로 지나치게 움츠러 있다면 여행 자체가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상식선에서 행동하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혹여나 잘못된 정보를 읽고 “남미 슬럼가 한번 체험해 볼까? 버스 타고 지나가면 안전하다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중남미 슬럼가를 체험하고 싶으신 분들은, “시티 오브 갓 Cidade de Deus” 영화로 대리만족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를 영화화 한 것이지만 실화구요. 중남미 대부분의 시골마을에서도 한두 가구는 약장사를 할 정도로 마약이 보편화 되어있는 것이 실상입니다. 시골에서는 식량부족으로 배고픔을 참기 위해 대마초나 약을 하는 경우도 있고, 슬럼가 지나가면 대낮에 본드를 부는 청소년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싸구려 마약에는 시멘트를 섞기 때문에 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이 동네마다 적지 않습니다. 저는 타간가에서 실제로 그런 사람과 마약관련 상인들을 눈앞에서 본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들은 하루 1달러 이하로 온가족이 생활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사람들 사는 곳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그래서 중남미에서는 대도시 시골 등 어디를 가나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게 상식 중 상식입니다.

월 70USD 벌어서 6명이 매일 바나나에 버터 발라 먹는 가족을 보신 적이 있나요? 완전 시골이나 슬럼가도 아니고, 콜롬비아 타간가 호텔에서 일하는 한 친구 이야기입니다. 바나나에 버터 발라먹으면 허기를 덜 느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타간가에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전체 인구중 반이 넘습니다.

정말 이런 사람들보다 더욱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빈민촌에 가서 그들이 주는 음식을 공짜로 받아먹고 자고 할 수 있을까요? 저라면 차마 목구멍을 못 넘길 것 같은데요… (이 경우도 아마 2번(진짜 빈민촌을 아직 못 가봤다)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행다니면서 진짜 큰 탈 한번 없었다는게… 진짜 위험한 데를 아직 못가본 거죠… 그리고 만약 갔었다고 해도 자랑스럽게 인터넷에 적을 내용은 아닐겁니다. 살아나온게 다행일테니까요…)



3. 위조지폐도 기념 삼아 일부러 한번 바꿔보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어떤 여행자가 겪은 일입니다. 터미널에서 달러 환전상을 따라서 한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환전상이 달러를 받고 중간에 볼리바르 화를 세면서 가짜돈을 바꿔치기 하는걸 보았답니다.


“왜 사기치느냐, 내 돈 도로 돌려줘라”라고 하니 환전상과 일행 2명, 총 3명이 사기 아니라고 하며 달러 못 돌려준다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랍니다.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할 것 같은 분위기에 당황한 이 여행자 분(덩치가 크고 완력이 좋은 분입니다), 환전상 머리를 잡아 책상에 박고 휴대하던 호신용 칼로 위협하여 달러를 나꿔채고 그 즉시 죽을 듯이 뛰어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긴후 카라카스를 떠났다고 합니다. (* 다른 분들은 절대로 이 분 흉내 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여행자 중에서는 강도와 싸우다 등에 칼을 맞은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남미에서 거리 환전상을 이용하는 것은 “나 털어가세요”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공식 환전소를 들어갔다 나와도 보고 있다가 쫓아와서 강도질을 하는 마당에… 운이 좋아야 돈만 사기당하는 거고, 까딱하면 “다 털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우 터미널에서 만난 환전상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대단히 위험합니다. 콜롬비아에서 넘어가는 경우 콜롬비아 국경쪽 터미널에는 공개된 장소에 환전소들이 있으므로, 환율이 조금 손해라도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 화폐를 조금만 바꿔간 후, 베네수엘라에서는 항상 터미널이 아닌 숙소에 도착해서 환전이 어디서 가능한지 물어보고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위에 언급한 저 여행자의 이야기도 그야말로 “술자리에서 무용담”으로 들은 것이지, 저 분 블로그나 정보글에서 과시성을 띤 채 자랑삼아 적으신 글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게 다른 사람을 상대로 글을 쓰는 사람의 “기본” 아닐까요? 자기자랑겸 일기는 일기장에 써야지 정보 올리는데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혼동과 위험을 안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배낭여행 안전에 대해 너무 몰상식한 글에 반박하느라,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쓴 것 같네요…

아래는 분위기 전환 겸 마무리 글입니다.

장기여행자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강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쩌면 여행자란 모두 ‘자아’가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겸손해지고 인격도 성숙하면 좋겠지만 반대로 편협해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죠.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한창 장기여행할 때, 저는 취사도구와 정수기를 들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항상 휴대용정수기에 수돗물 받아서 먹느라 1년반 동안 물값이 아예 안들었구요. 이집트에서 샀던 휴대용전열기로 밥도 해먹고 커피도 끓여먹고, 아침은 무조건 커피 한잔에 빵 몇조각 등 온갖 궁상을 다 떨었죠.

원래 생각했던 일정보다 더 여행을 하고 싶고, 돈은 없고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만… 그런 하드한 여행의 결과물로 76->60kg까지 빠진 몸무게와 망가져버린 육체를 얻었습니다. (물론 여행 끝난 후에는 다 회복되었지요.)

이집트 여행 초기만 해도 저는 콜라를 꼭 1.5리터 짜리로 사먹었습니다. 그러다 캔 콜라를 그때그때 사먹는 여행자를 처음 보고 경악했죠. “장기여행자가 비싼 캔 음료수를 사먹다니!” 그 이야기를 했는데 상대방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난 돈 아낀다고 1.5리터 콜라 사서 먹는 사람 첨 봐요. 목 마를 때 시원하게 마시는 게 음료수지, 싸게 먹는다고 김 빠지고 뜨거워진 콜라 먹는 게 바보짓 아니에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더군요. 그 당시만 해도 장기여행자들끼리 만나면 누가 더 여행을 오래했니, 누가 돈을 더 적게 쓰고 다니니, 자기가 여행한 곳이 제일로 좋았다느니 은근히 경쟁하던 때였거든요. 생각해보니 스스로 처지가 참 우습더군요. 이집트처럼 물가가 싼 곳에서(당시 콜라 한 캔은 카이로에서
약 200원, 다합 등 관광지에서 바가지 써도 400~600원) 아낀다고 온갖 궁상 다 떨고 유럽 같은데선 박물관 입장에 건당 만원씩 썼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는 저도 뜨겁고 김 빠진 콜라 더 이상 먹기 싫더군요. 그때그때 목 마를 때 콜라 작은 걸로 사서 마십니다. 둘다 일장일단은 있지요. 무조건 돈을 아끼는 것이 목적이라면 1.5리터 콜라, 필요할 때 욕구충족(?)을 극대화하려면 캔 콜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콜라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장기여행하면서 갈증을 느끼는 순간에 이 재미있는 질문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

모두들 항상 안전하게, 사고 없이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여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